일제치하의 엄혹한 시절 단재 신채호 못지않은 기개로 독립운동을 펼치신 박자혜 여사를 아시나요? 그녀는 지금의 숙명여대의 전신인 명신여학교에 입학하여 근대 교육을 받고 조선총독부 의원 간호부로 근무했습니다.
3.1만세운동 부상자를 치료하다 조산원과 간호부로 근무하는 한국인 동료를 규합하여 ‘간우회’를 조직해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고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 연경대학 의예과 입학하여 공부했습니다.
1920년 우당 이회영선생의 중매로 단재 신채호와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안타깝게도 두 분의 결혼 생활은 2년 반 남짓, 박자혜 여사는 아들과 서울로 돌아와 조산원을 개원합니다, 그리고 조산원을 하면서 독립 운동가를 위해 정보와 편의를 제공합니다.
1936년 남편 신채호 선생이 뤼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순국하시고 여사님은 ‘모든 소망이 끊어졌다고’ 한탄하셨다 합니다.
영양실조로 둘째 아들도 앞세우시고 남편 잃은 설움과 고통을 안은 채 1943년 10월16일 순국하셨습니다.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그러하듯이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투쟁의 혈서로 살으신 박자혜여사를 추모하며 그녀의 마음, 가슴에 다시 새겨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