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의 가계
신채호는 고령신씨(高靈申氏)로서, 조선 초기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18세손이다.
신숙주의 넷째아들 신정(申瀞,1442-1482), 다섯째아들 신준(申浚,1444-?), 일곱째아들 신형(申泂,1449-?) 등 세 사람이 청주 상당산 동쪽 지역에 내려와 터전을 잡는다. 따라서 이들 삼형제의 후손들을 고령신씨 문중 가운데 산동신씨(山東申氏)라 부른다.
신정의 후손들은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청용리에 터전을 두었는데 이들이 ‘고천군파’다. 신채호가 이 계파에 속한다. 신준의 후손들은 가덕면 인차리를 중심으로 터전을 형성하는데 이들이 ‘소안공파’다. 예관 신규식(申圭植,1879-1922)이 이 계파에 속한다. 신형의 후손들은 낭성면 관정리에 터를 잡는데 ‘영성군파’다. 경부 신백우(申伯雨,1887-1962)가 이 계파에 속한다. 또한 신채호, 신규식, 신백우를 산동삼재(山東三才)라 부르는데, 이는 산동신씨 가문의 세 천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단재의 직계 가계도
산동신씨 가문은 1728년에 청주에서 일어났던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영성군파인 신천영(申天永,?-1728)이 반란의 주모자로 참살되고, 단재의 5대조인 신두모(申斗模,1759-1807) 역시 반란에 연루되어 가문 전체가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이후 단재의 조부 신성우(申星雨,1829-1907)에 이를 때까지 누구도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조부 신성우는 신채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할아버지이자 아버지였으며 스승의 역할까지 1인 3역을 담당했다. 신성우는 “이인좌의 난” 이후 신채호 가문에서 처음으로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간다. 『승정원일기』에 나타난 신성우의 관직 이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67년 승정원 가주서(정7품), 1868년 예조 좌랑(정6품), 1868년 사헌부 지평(정5품), 1871년 사헌부 장령(정4품), 1882년 군자감정(정3품, 당하), 그리고 1883년부터 1885년까지 다시 사헌부 장령을 역임한다.
신성우는 1868년 사헌부에 재직하면서 당시 71세였던 부친 신명휴(申命休,1798-1873)에게 시종신(侍從臣)의 부모라는 이유로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되는 영광을 안겨준다. 그리고 1873년 부친이 돌아가시자 벼슬을 사임하고 낙향하여 상례를 치른다. 이후 신성우는 대전의 처가에서 요청한 훈장 초빙을 받아들여 대전으로 솔가하였다가, 1880년 여름 다시 사헌부 장령을 제수 받고 상경한다. 이해 겨울 대전에서 신채호가 태어났다.
이후 대전에 남은 가족들이 더 이상 안동권씨 친정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터에, 가장이었던 신채호의 부친 신광식마저 병에 걸려 투병하게 되자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 선택된 곳이 낭성면 귀래리였다. 아들(신광식)이 투병을 하고 있었기에 신성우 역시 1885년 서둘러 관직을 사임하고 귀래리로 낙향하여 가족들을 돌본다. 그러나 이듬해 아들 신광식의 사망, 1899년 장손 신재호의 사망으로 신성우의 대를 이을 후손으로는 신채호 단 한 사람만 남게 된다.
신성우는 1902년 황제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기념으로 “4품 이상 70세가 된 조관(朝官)” 자격으로 가자(加資)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지만, 생애의 말년을 오로지 하나 남은 손자 신채호의 입신양명을 위해 혼신을 힘을 기울이다가 1907년 일생을 마쳤다. 그리고 3년 뒤 신채호의 망명으로 귀래리 집이나 인근에 산재한 가족들의 무덤도 더 이상 관리가 되지 않아 방치되었다가 대부분 잃어버렸다
신채호의 부친 신광식(申光植,1849-1886)은 부인 밀양박씨와의 사이에서 첫째아들 신재호(申在浩,1872-1899)를 낳았고, 서른두 살 때 둘째아들인 신채호를 낳았다. 단재의 형인 신재호는 순흥안씨와 결혼하여 1898년 딸 신향란(申香蘭,1898-1932)을 낳은 뒤에 이듬해 29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신채호는 망명길에 오르면서 대한매일신보 시절 서울 삼청동 자택에서 함께 살던 어린 조카 신향란을 진남포 출신 독립운동가 임치정(林蚩正,1856-1932)에게 의탁했다. 신향란은 진남포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교육을 받고 자라 홍어길(洪魚吉,1899-1988)과 결혼한 뒤에 지금의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에서 6남매를 낳아 기르다가 1932년 폐병으로 역시 요절하였다. 신향란의 남편 홍어길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1988년 사망하였는데, 신향란과 사이에서 낳은 후손들이 현재 미국과 국내에 살고 있다.
신채호는 1895년 청주에서 풍양조씨와 결혼하였다. 1907년 황성신문에서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긴 뒤 삼청동 자택을 구입하여 청주에 있던 부인과 조카 신향란을 불러 함께 살았는데, 1908년 이곳에서 아들 관일이 태어났다. 그러나 이듬해 부인의 모유가 부족하여 대신 먹이라고 사다준 연유를 잘못 먹여 체한 아들이 사망하고 말았다. 이 일을 계기로 신채호는 위자료로 논 다섯 마지기를 사주고 부인과 이혼하였는데, 이미 망명을 결심한 터라 단신으로 떠나기 위하여 신변을 정리한 것으로 짐작된다.
신채호는 1920년 베이징에서 독립운동가 박자혜(朴慈惠,1895-1943)와 재혼한다. 박자혜는 3.1혁명 당시 <간우회>를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연경대학 의예과에 재학하고 있었다. 1921년 장남 신수범(申秀凡,1921-1991)을 낳은 신채호와 박자혜는 2년 남짓 짧고 행복했던 신혼살림을 마감하고 긴 생이별에 들어간다. 서울로 돌아와 인사동에서 박자혜 산파를 운영하며 생계를 꾸리던 박자혜는 “아들 수범이 보고 싶다.”는 신채호의 편지를 받고 1927년 1월 베이징으로 달려가 한 달 동안 함께 생활한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는데 그해 겨울 차남 신두범(申斗凡,1927-1942)이 출생하였다.
1936년 신채호가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였을 때 장남은 16세, 차남은 10세였다. 한성상업학교를 졸업한 장남 신수범이 북만주의 민족자본 계열 은행에서 일하고 있던 1942년 차남 신두범이 영양실조로 사망하였으며, 이듬해 박자혜 역시 홀로 쓸쓸히 병사했다. 박자혜의 시신은 수습할 사람이 없어 장남의 친구가 화장하여 유해를 한강에 뿌렸다. 장남 신수범은 신채호의 업적을 정리하고 국적을 회복하는 일에 매진하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91년 파란만장한 독립운동가 후손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신채호의 대한민국 국적은 이후 2009년에야 회복되었으며, 신수범의 부인인 ‘단재의 며느리’ 이덕남과 손녀 신지원, 손자 신상원, 증손자 신정윤 등이 현재 국내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