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의 생애
- 국내에서의 활동
- 국외에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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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활동 시기(1880-1910)
1) 유년시절(1880-1885)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 229번길 47>에서 태어났다. 생가의 이전 주소는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번지> 혹은 <충청남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였으며, 더 이전에는 <충청도 공주목 회덕현>이었다.
신채호가 대전에서 출생하게 되는 배경은 조부 신성우가 처가인 안동권씨 문중의 훈장으로 초빙되자 아들(신채호 부친 신광식) 내외를 솔가하여 이곳으로 이주하기 때문이다. 조부 신성우는 부친이 사망하는 1873년 이후 어느 무렵부터 1880년 초반까지 이곳에서 훈장을 역임했다. 따라서 1872년생인 신채호의 형 신재호는 가덕면 청용리에서 출생한 이후 대전으로 이주한 것이 된다. 대전 어남동은 신채호의 조모 안동권씨의 친정이었으므로, 신성우의 처가이자 신채호의 진외가였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조부 신성우가 단순히 가난을 이유로 처가살이를 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지면서 매우 허름한 산막이나 묘지기 집으로 가정하였지만,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초가삼간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지금의 집터가 생가지가 아니며, 근처의 다른 묘막이나 산지기 집터가 생가 터라는 주장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
대전에서 훈장 생활을 하며 아들 내외와 생활하던 신성우는 1880년 여름 다시 사헌부 장령을 제수 받아 상경한다. 그리고 그해 겨울 신채호가 태어났다. 조부의 서당 훈장 급여로 가계를 꾸리던 것이 중단되자 신채호의 조모와 부친은 더 이상 친정이나 외가마을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그리고 이때 이미 신채호의 부친 신광식은 모종의 신병이 발생하여 투병을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저런 이유가 겹치자 신성우를 비롯하여 신채호 일가는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2) 청소년시절(1886-1897)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는 신채호가 대전 어남동에서 이주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할 때까지 청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대전에서 귀래리로 이주하는 시기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연구를 종합하면 대략 1882년(3세)부터 1885년(6세) 사이로 추정된다.
신채호가 살았던 귀래리의 집은 현재 묘소가 있는 자리에 있었다. 조부를 제외한 신채호 일가가 대전에서 이곳으로 먼저 이사한 뒤, 1885년 가을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조부 신성우도 낙향하여 이곳으로 합류한다. 신성우는 현재 사당 뒤편에 있는 이전 묘소 자리에서 서당을 운영하였는데 신채호는 형 신재호와 함께 여기서 조부에게 한학을 배운다.
조부가 낙향한 이듬해인 1886년 3월에는 대전에서부터 이미 지병을 앓고 있던 부친 신광식이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신채호는 조부 슬하에서 학문에 매진하여 10세에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해독하고 행시(行詩)를 지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으며, 14세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독파하여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청년으로 성장한 신채호는 인근에 사는 신병휴(申秉休, 신백우의 부친), 신승구(申昇求, 1850-1932) 등에게 학문을 점검받은 이후, 신기선(申箕善,1851-1909)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한다.
3) 성균관 시절(1898-1900)
1898년 신채호는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 경학과(經學科)에 입학한다. 성균관 경학과는 1895년 새롭게 편제된 3년제 근대 교육과정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대과 시험이 가장 큰 목적이었던 성균관 교육체계의 존립근거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때 대응책으로 신설된 것이 바로 경학과였다.
경학과에는 처음으로 3년제의 학년제가 도입되었으며 역사, 지리, 세계사, 세계지리, 수학 등 다양한 서양학 과목을 대거 편제하여 신학문을 가르쳤다.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더 이상 소과 합격생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경학과 학생들은 모두 문음(門蔭)의 자제들이나 권력고위층의 추천에 의해 결정되었다.
신채호는 성균관에 재학하면서 유인식(柳寅植), 김연성(金演性), 조용은(趙鏞殷) 변영만(卞榮晩)을 비롯하여 다양한 인사들과 사귀었다. 더불어 당시 한창이었던 독립협회 운동과 만민공동회 등에 참여하여 격변하는 개화기의 한양을 몸소 체험한다. 이때 잠시 체포되어 투옥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1901년 성균관 경학과 3년 과정을 모두 수료한 신채호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다.
4) 애국계몽 교육운동(1901-1904)
1901년 고향으로 돌아온 신채호는 신규식(申圭植,1879-1922), 신백우(申伯雨,1887-1962)와 더불어 <문동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 교육운동을 시작한다. 맨 처음에는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 있는 고령신씨 소안공파 종갓집 10칸을 빌려 학교로 사용하였다. 1903년 새 교사로 신축 이전하면서 ‘문의군 동면’의 앞 글자를 하나씩 따다 문동학교로 명명하였다.
1903년부터 문동학교로 사용되었던 곳은 현재 <신형호 고가>로 남아있는데 1881년에 지은 고택이다. 이 가옥은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8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형호의 부친 신정식을 비롯하여 신규식, 신건식, 신동식 4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관여하였다.
이 집의 사랑채를 신축하여 문동학교를 이전한 뒤 신규식은 개교사(開校辭)를 통하여 “무(武)를 경시하고 국민교육과 역사의식의 부재로 인해 국운이 쇠약해졌으므로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질 것”을 강조하였고, ‘지·덕·체’ 3대 교육 덕목으로 부국강병 정신을 고취하였다고 한다.
인근 청주 등지에서 유능한 교사들을 초빙하여 산술, 측량, 국사 등 10여 과목을 가르쳤다.
신규식, 신채호, 신백우 등 산동삼재들은 1904년부터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에 다시 <산동학당>을 개설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이어간다.
5) 언론활동 및 국권회복 운동(1905-1909)
1905년 낭성면을 방문했던 위암 장지연(張志淵,1864-1921)과 만난 신채호는 그의 초청으로 <황성신문> 논설기자가 되어 상경한다. 이때부터 1910년 해외 망명 시기까지 짧았지만 매우 강렬했던 언론활동과 국권회복 운동을 펼친다.
1907년 신채호는 이회영, 양기탁, 안창호, 이승훈 등과 함께 <신민회> 결성에 참여한다. 그리고 <황성신문>에서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민중계몽과 언론구국운동에 매진한다.
이 무렵 신채호의 집필활동은 대략 세 갈래로 나뉘는데 「일본의 삼대충노」, 「한일 합병론자에게 고함」 등과 같은 항일 국권회복운동에 관한 논설, 「독사신론」을 비롯하여 ‘민족’을 중심으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신채호 특유의 민족사관 정립, 을지문덕을 비롯하여 역사 속 영웅들의 전기를 집필하여 국권회복과 민족부흥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1910년, 국권회복은커녕 오히려 망국의 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 아래 <신민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망명이 진행된다. 이때 신채호 역시 여준, 이광수 등이 있는 정주 오산학교에 들러 잠시 머문 다음 5월 말 압록강을 건너 망명길에 올랐다. -
해외 활동 시기(1910-1936)
1) 블라디보스토크(1910-1913)
1910년 6월,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 신채호는 <신민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칭다오에서 <청도회의>를 거친 다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 그러나 북만주의 미산(蜜山) 지역을 중심으로 토지를 개간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등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 했던 <청도회의>의 결의는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이에 블라디보스토크로 합류한 신채호는 〈해조신문〉의 후신으로 발행하던 〈대동공보〉에 논설을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1911년 <대양보>가 창간되자 주필을 맡아 본격적으로 연해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말, 블라디보스토크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가 출범하였다. 이때 신채호가 맡은 직책은 서적부장이었는데 이는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을 의미한다. <권업신문>은 1912년 5월부터 발행을 시작하여 1914년 8월 정간될 때까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주1회씩 126호를 발행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의 교육계몽과 교민통합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12년 8월 29일자 국치일 특집호 <권업신문>에는 신채호의 「이날」이 실려 있다.
신채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는 동안 우수리스크, 빠르티잔스크, 크라스키노 등지에 산재해 있는 발해 유적지를 꼼꼼히 답사했다. 이때부터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발해로 이어지는 만주역사에 대한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권업회>를 둘러싸고 지역의 파벌끼리 나뉘어 서로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차에, 상하이에서 신규식이 여비를 보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다.
2) 상하이 1차(1913)
1913년 하반기에 상하이로 자리를 옮긴 신채호는 신규식의 주도 아래 결성되어 활동 중인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였다. 더불어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문일평, 박은식, 정인보, 조용은, 홍명희, 이광수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고민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특히 <동제사>의 교육기관이었던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는 것이 주요 활동이었다.
이때 신채호가 상하이에 머문 시간은 대략 6개월 정도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하이로 몰려드는 망명 지사들의 집합소 역할을 했던 신규식의 집에 함께 기거했으며, 인근에 따로 방을 얻어 생활하던 벽초 홍명희와 그 방에 더부살이하던 춘원 이광수 등과 특히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그해 겨울, 만주 환런의 <동창학교>에서 초청장이 오면서 신채호는 곧 상하이를 떠난다.
3) 만주(1914)
신채호는 1914년 초 환런으로 이주하였다.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세용(尹世茸), 윤세복(尹世復) 형제가 1912년 환런에 문을 열었던 <동창학교>의 교사로 초빙한 것이다. 동창학교는 대종교에 깊숙이 관여했던 이들 형제의 영향으로 단군사상을 민족사의 정통으로 삼은 교과서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역사, 국어, 한문, 지리 등을 가르쳤다.
당시 교사는 윤세용, 윤세복 형제 이외에도 이원식, 김형, 이극로, 이시열, 김규환 등이 있었으며, 학생들은 대부분 독립투사의 자제들이었다. 교내에 기숙사가 있었고, 독립운동가나 이주 동포들의 생활이 매우 곤궁하였기 때문에 기숙사비와 옷값 따위를 학교에서 모두 지급해 주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집요한 방해 공작이 펼쳐졌는데 동창학교는 결국 1914년 말 폐교된다. 졸업연한이 4년제였기 때문에 개교 3년 만에 폐교된 동창학교는 단 한 명의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한 채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환런을 떠나고 말았다. 역사를 가르쳤던 신채호는 『조선사』를 집필하여 교재로 사용했는데 이 『조선사』는 아쉽게도 지금 전하지 않는다.
신채호의 시 「무제(無題)」에는 “1914년 단오에 환인현에서 이탁, 윤세용 등과 함께 시를 한 편씩 지었다.”는 부제가 달려있다. 신채호는 이때부터 베이징으로 옮겨가는 겨울까지 동창학교에 재직하면서 고구려의 첫 번째 도읍지였던 환런을 비롯하여 지안과 백두산 일대의 역사유적을 꼼꼼히 답사한다. 이 무렵 안희제, 남형우, 서상일 등이 단둥에서 재조직하여 신채호를 단장으로 추대했던 <대동청년단> 단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이 <대동청년단> 단원들이 신채호와 함께 광개토대왕릉을 비롯하여 만주 일대 답사를 함께 했다.
4) 베이징 전기(1915-1919)
신채호가 처음 베이징 땅을 밟은 것은 망명하던 해인 1910년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데 필요한 러시아 입경증명서 발급을 위해 러시아 영사관을 잠시 방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다음 본격적으로 베이징에 도착하여 체류를 시작하는 시기는 <동창학교>가 폐교되고 난 뒤 1914년 말에서 1915년 초였다.
이때부터 여성독립운동가 박자혜와 결혼하여 진스팡제에 신혼살림을 차리기 이전까지가 전기 베이징 시절인데, 이 무렵의 대부분을 주로 자금성 남서부에서 살았다. 중국으로 무대를 옮긴 숱한 애국지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채호 역시 극심한 가난과 타국생활의 서러움 속에서 망명객의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따라서 일정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여관이나 월세를 내는 싸구려 민박을 이용하거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형편이 그만한 지인들의 거처에 얹혀사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때 신채호가 거주했던 곳 가운데 기록에 남아 있어 윤곽을 어림잡을 수 있는 곳은 1918년 일정 기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진 스떵안(石燈庵)과 푸퉈안(普陀庵), 그리고 1920년 4월 결혼을 전후해서 신혼살림을 차렸던 진스팡제(錦什坊街) 골목 정도가 고작이다. 신채호는 이 시기에 역사와 문학 저술과 논설 집필에 전념했다. 『꿈하늘』, 『일목대왕(一目大王)의 철추(鐵椎)』, 「이해(利害)」, 「도덕(道德)」과 같은 글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으며, <북경일보>와 <중화보> 등 당시 베이징의 쟁쟁한 언론에 논설을 실어 문명을 떨치기도 했다.
대외활동으로는 1917년 상하이에서 신규식, 조용은, 박용만, 홍명희 등 14인이 서명했던 <대동단결선언>과 1919년 2월, 만주 지린에서 <대한의군부>가 주동이 되어 발표했던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하였다.
5) 상하이 2차(1919)
1919년 3월 하순 신채호는 상하이에 도착하여 4월 10일부터 1박2일로 진행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차 의정원회의에 참석한다. 이때 국제연맹에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선출된 것에 대한 강력한 불만을 제기하였다. 신채호는 제1차부터 제6차까지 의정원 의원과 전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선과 방략을 수정하려 노력하였으나, 제6차 의정원 회의에서 결국 외교노선을 앞세운 이승만이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임되자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임정과 결별한다.
임정의 직책을 사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포기할 수 없었던 신채호는 바로 상하이를 떠나지 않고 김두봉, 한위건 등과 함께 〈신대한(新大韓)〉 신문을 발행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선과 이승만 외교주의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던 <독립신문>의 주간을 맡고 있던 이광수가 신채호를 <독립신문>의 주간으로 회유하려다가 실패하자 임정이 인쇄소에 압력을 가해 결국 <신대한>은 3개월 만에 폐간의 운명을 맞는다. 이에 신채호는 모든 것을 단념하고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간다.
6) 베이징 후기(1920-1928)
1920년 베이징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 참여하였다가 먼저 베이징으로 돌아온 우당 이회영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귀환, 그리고 곧 합류하는 심산 김창숙 등이 모이면서 이른바 ‘베이징삼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임시정부의 위임통치 외교노선에 반대하며, 민중이 직접 주동하는 무장투쟁만이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무장투쟁론자들이 속속 집결하였다. 베이징으로 돌아와 박자혜와 결혼한 신채호는 신혼살림 와중에 가장 먼저 순한문잡지 『천고』를 발행하였다. 『천고』를 중국어로 발행한 까닭은 한국과 중국의 민중들이 힘을 합쳐 일제와 싸워야한다는 당위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베이징에 모여든 다양한 무쟁투쟁론자들과 함께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반민족적 행위로 간주하는 동시에, 남북만주에 산재한 독립군을 하나의 지휘체계로 통솔하는 군사통일 운동에 매진하였다.
베이징의 군사통일 운동 세력이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발기하여 소집을 주창했던 <국민대표회의>가 별다른 성과 없이 막을 내리자, 신채호는 베이징의 동지들과 함께 암살과 파괴를 주요 무기로 하는 의열투쟁에 주력한다. 1923년 1월, 일제강점기 최고의 명문장으로 꼽히는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고 1924년에는 「다물단선언」을 집필하였는데 이 「다물단선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신채호는 <의열단>과 <다물단>의 정신적 지주였다.
이 무렵 신채호는 훗날 『조선상고사』로 출간되는 미완의 조선통사를 꾸준히 집필하고 있었으며, 역시 나중에 『조선사연구초』로 출간되는 6편의 논문을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더불어 진정한 민주국가를 건설하려면 불필요한 권력에 의한 지배를 없애야 한다는 판단 아래 무정부주의에 심취하여 다양한 ‘선언문’을 작성하였으며, 1928년에는 아나키즘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을 발표하기도 했다.
7) 대련형무지소 (1928-1930)
1928년 4월 25일, 신채호는 마지막으로 베이징을 떠난다. 톈진에서 배를 타고 일본 모지를 거쳐 타이완 지룽에 도착한 것은 5월 8일이었다. 그러나 지룽우편국에서 중국인 가명으로 위장하고 위체의 환전을 기다리던 신채호는 일제 형사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외국 위체를 위조하여 일본, 조선, 만주, 타이완 등지로 발송한 뒤 이를 각각 현금으로 인출하려는 이른바 <무정부주의자동방연맹사건>이었다. 지룽경찰서에서 일차 조사를 받은 신채호는 곧 다롄으로 압송되어 다롄형무지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다롄지방법원에서 장장 2년에 걸친 기나긴 재판을 받는다. 신채호가 워낙 거물이었기 때문에 단순한 외국환 위체 위조범이 아닌 치안유지법 위반의 사상범, 내지는 베이징에서 있었던 살인사건과 결부시켜 어떻게든 형량을 늘이려는 일제의 계략 때문이었다.
1928년 10월 24일 신간회에서 파견한 이관용(李灌鎔)이 다롄형무지소의 신채호를 면회한 뒤에 쓴 「대련감옥에서 신단재(申丹齋)와 면회」가 11월 8일자 <조선일보>에 실려 있다. 신채호는 안질이 낫지 않아 고생한다고 하면서도 웰스(H.G. Wells)의 『세계문화사』 일본어판과 『에스페란토 문전(文典)』을 넣어달라고 했다. 더불어 백호(白湖) 윤휴(尹鑴,1617-1680)의 문집을 육당 최남선에게 부탁했는데 어찌되었는지 알아봐주고, 솜을 넣은 옷 한 벌과 조선 버선 몇 켤레를 요구했다. 난방은 고사하고 이불 한 장 변변찮았을 다롄의 차디찬 감방에서 첫 추위와 싸우던 신채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8) 뤼순형무소(1930-1936)
1930년 4월 28일 신채호는 다롄형무지소에서 관동청형무소(뤼순형무소)으로 이감된다. 미결수 신분으로 다롄형무지소에서 2년의 수감생활을 하며 “치안유지법 위반, 유가증권 사기 위조 동 행사, 살인 및 사체유기”의 죄목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은 지 18일 만이었다.
그로부터 1년 7개월이 지난 뒤 뤼순형무소에서 신채호를 면회했던 신영우(申榮雨)의 「조선의 역사대가 단재 옥중회견기」가 <조선일보>에 7회에 걸쳐 실려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건강에는 큰 이상이 없었으며, 평소에 고생하던 안질이 좀 그만한 대신 소변을 자주 보는 것이 불편하다고 털어놓는다. 노역(勞役)을 해야 하기 때문에 10분씩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독서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의 건강 상태로 8년이나 더 남은 형기를 견딜 수 있겠냐?”는 신영우의 질문에 신채호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혹독한 수감생활로 인한 신채호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보다 못한 감옥의 배려(?) 아래 서울의 저명한 문중 인척을 보증인으로 병보석 출감을 권유하였으나, 신채호는 친일파 보증인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1936년 2월 21일, 신채호는 끝내 뤼순형무소의 차디찬 감방에서 순국한다. 만기출소 예정일은 1937년 10월 17일, 잔여 형기 1년 8개월이 남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