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술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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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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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는 역사학자였지만, 언론인으로 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사관은 그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그의 초창기 사관은 소수의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영웅주의사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고, 따라서 고대문화를 폭 넓게 이해하게 되면서 영웅주의 사관을 극복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에는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혁명을 주도하여 항일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폭력적 항일운동과 무정부주의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단재는 한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사관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그가 국사의 연구와 교육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국사의 연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민족의 자강과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의 민족주의 사관은 민족의 자강과 독립이라는 사상적 바탕위에서 성립된 것이었다. 이와같이 그의 사학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지만, 민중을 주체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유교적인 전근대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근대사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
단재선생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있으면서, 풍전등화와 같은 국운을 안타깝게 여기는 한편, 쇠미해진 국운을 떨쳐 일으키고자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 정신을 찾으려고 집필한 글이다. 이 글은 1908년 8월 27일부터 9월 15일까지, 10월 29일부터 12월 13일까지 총 50회에 걸쳐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12월 13일자 연재끝에는 '미완'이라고 되어있다.
이 글에서 단재는 우리 민족이 단군의 후예이며, 중심종족은 부여족임을 천명하고, 기자를 정통에서 몰아내었다. 단군시대로부터 삼부여(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부여족을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성쇠를 살피고 있으며, 특히 고구려의 멸망을 부여족 쇠퇴의 결정적 원인으로 파악하고 이를 규명하였고, 발해의 역사가 민족사에서 빠진 것과 그 원인을 서술하였다. -
단재선생이 중국 북경에 망명해있던 1924년, 25년경에 쓴 것으로 짐작되는 '조선사'의 총론 부분으로 1931년 6월 10일부터 6월 25일까지 14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이다. 이때 '조선사'는 총 102회나 연재되었고(10월 14일까지), 이어서 '조선상고문화사'가 두 번으로 나뉘어(1931년 10월 15일 ∼ 12월 3일, 39회;1932년 5월 27일 ∼ 5월 31일, 4회) 같은 신문에 총 43회분이 연재되었다.
이 '조선상고사 총론'은 '조선사'에 붙은 총론이므로 '조선사총론'이라고 해야 하지만, 단재 선생의 이 저술이 상고시대에까지 밖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조선상고사 총론'이라 한 듯하다.
단재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정의하고, 조선민족을 아의 단위로 삼아 그 정치·사회 등 각 분야의 소장성쇠를 서술하였다.
역사의 구성요소를 시(時)·공(空)·인(人의) 세가지로 파악하고, 이에 바탕하여 조선의 기존 역사서들에 대한 철저한 문헌비판을 제기하였다. 그 방법으로 이두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각종 전적에 대한 사료비판, 언어·풍속의 연구 등을 제시하였다. -
1925년경 동아일보에 게재된 글로 단재는 이 논문에서 삼한을 전삼한과 후삼한으로 나누어 논증하였다. 전삼한은 곧 삼조선으로 단군시대의 신·불·말 조선을 가리키며, 후삼한은 마한·진한·변한 즉 백제·신라·가야라 하였다. 단재는 이두의 해석 방법을 이용, 삼조선의 범위를 요동일대에 비정하여 고대사의 강역을 넓혔고, 마한 50여국과 진한과 변진 24개국의 위치 비정(比定)을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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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선생이 1910년대 후반에 저술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상고사에 관한 글로 1931년 당시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이 문헌은 단재의 역사연구단계로 볼 때 '독사신론'에서 '조선상고사'로 이행하는 중간단계의 작품으로 그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독사신론'에서는 단군·부여·고구려로 계승되는 역사인식체계와 그 역사무대로서 만주를 중요시하였지만, 이 책에서는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부여족의 식민지로서 중국대륙의 일부까지를 우리의 역사로 수용하고 있다. 이에따라 한사군의 반도외존재설과 전후삼한설 등이 새롭게 주장되어지게 되었다.
둘째, 대종교적 분위기에 젖어든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고적답사를 통한 현장확인, 문헌수집, 유물발굴 및 실증적 방법의 적용 등의 노력을 엿볼 수 있으며 평이한 국한문 문체의 역사저술을 느낄 수 있다.
셋째, 한국의 상고문화에 대한 국수주의적이고 자존적인 인식이 뚜렷하다. 단군왕조를 강조한 것은 대종교의 포교와 관련이 깊겠지만, 그 밖에 우리의 상고문화가 중국을 능가하는 우수한 문화임을 강조하는 여러 사례들이 기술되어 있는 것은 이 책이 중국에 대한 문화사대와 일제의 식민지상황을 철폐하려는 자주적인 역사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
1925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글인데, 이 글에서 단재는 묘청이 일으킨 서경전역의 이면에는 낭·불·유(郎佛儒) 3가의 쟁투가 감추어져 있었으며, 이는 곧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다툼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낭·불 양가는 패퇴하고 유가가 집권하여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이 소멸되었다고 보았으며, '삼국사기'를 그 산물이라고 보았다.